본문 바로가기

정보와 생활/웹과 IT

[ERP 10년의 발자취 - (하)] '한국형' ERP의 어제와 오늘

 

[ERP 10년의 발자취 - ()] '한국형' ERP의 어제와 오늘

 

1995, 외국 글로벌 기업들의 ERP 솔루션이 국내에 첫 선을 보이던 때, 기업용 소프트웨어 패키지 시장에는 경영정보시스템, 이른바 'MIS' 패키지라는 이름의 국산 소프트웨어들이 시장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주로 회계관리, 재고관리, 생산관리 등 업무영역별 독립된 패키지였다. 기업의 특정 부서에서 업무 전산화에 활용하기 위해 구매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한국기업전산원(현 소프트파워), 한국하이네트, 영림원 등이 초기 MIS 패키지 소프트웨어 시장의 대표적인 기업들이었다.

 

SAP와 오라클 등 외국 글로벌기업들이 처음 진출했을 때, 이들을 '외국 MIS 업체'로 분류하기도 했을 만큼 당시 기업용 정보관리 소프트웨어는 'MIS'란 이름이 일반적이었다.

 

사실 ERP MIS, 용어만 놓고 보면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기업의 모든 자원을 관리한다는 ERP, 경영정보를 관리한다는 의미의 MIS는 개념적으로 다를 게 없다. 그러나 개념을 실제 구현해 시장에 나와있던 패키지 소프웨어를 보면 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MIS란 이름의 패키지가 기업 내 특정업무 영역별로 독립된 형태의 제품이었다면, ERP는 모든 영역을 아우르면서 각 영역이 유기적으로 통합된 거대한 패키지였다. 규모 자체도 비교가 안되고, 기본 사상도 업무프로세스를 소프트웨어에 맞추라고 할 만큼 ERP는 경영관리의 프로세스 그 자체를 의미했다.

 

외국 ERP 업계 관계자는 "ERP의 핵심은 모든 기업 자원의 통합관리가 가능하다는 것"이라며 "당시 국내에는 통합이라는 관점에서 기업 정보를 관리해주는 소프트웨어가 없었고 그런 점에서 ERP는 혁신적인 개념의 제품이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국산 소프트웨어와 외산 소프트웨어는 비교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잘라 말했다.

 

실제 이후 벌어진 대형 ERP 프로젝트는 거의 모두가 외국 기업들간의 각축전이었다. 국산 소프트웨어 업체들은 외국기업들의 관심밖이었던 중소기업 시장에서 시장을 넓히며, 안으로는 ERP 개념을 수용한 제품개발에 들어간다.

 

'한국형' ERP의 등장

 

외국 ERP 솔루션의 등장과 함께 국산 MIS 패키지 업체들은 ERP로 잇따라 눈을 돌린다. 기업 정보화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외국 기업들의 진출은 국산 소프트웨어 업체들에게는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였다.

 

제품 경쟁력에서 뒤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외국 기업들의 진출은 위기였지만, 이들이 ERP 라는 새로운 시장을 열어줌으로써 국내 업체들에게도 기회는 생긴 셈이다. 더구나 외국 ERP 업체들의 타깃은 대기업이었다. 중소기업은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외국산 ERP를 염두에 둘 처지도 아니었다.

 

국산 MIS 업체들은 중견 및 중소기업을 타깃으로 ERP 업체로 변신을 꾀한다. 그러면서 이들이 전면에 내세운 것이 바로 '한국형' ERP.

 

SAP가 국내에 발을 디딘지 1년후인 1996년 소프트파워와 한국하이네트가 산학 공동 프로젝트 형태로 '한국형 ERP' 개발에 착수한다. 이후 1997 '한국형'을 내세운 국산 ERP들이 하나둘 시장에 선보이기 시작한다. 영림원이 'K.system'을 발표하고 뒤이어 한국기업전산원이 '탑 엔터프라이즈'를 내놓는다.

 

대형 SI업체인 삼성SDS '유니이알피(UniERP)'로 시장에 가세했고, 이후 한국하이네트, 뉴소프트기술(현 인크루트), 더존디지털 등이 ERP 시장 진출을 선언한다.

 

이같은 '한국형' ERP는 외국기업들의 국내 진출에 맞서 텃밭을 지키려는 전략적 대응책으로써 국내 기업들간에 공감대가 형성된 공동의 마케팅 전략이다.

 

ERP는 기업의 업무 프로세스를 자동화해주는 소프트웨어다. 업무 프로세스를 표준화, 정형화한 후 이를 정보시스템으로 구현한 것. 그런데 업무 프로세스는 기업이 속한 사회, 문화적 특성을 반영한다. 이 때문에 '한국형' ERP를 내세운 국내 기업들은 외국 ERP가 제시하는 업무 프로세스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한국형'은 이 부분을 노렸다. 외국 기업들의 ERP는 우리 기업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서 국내 기업의 문화는 국산 솔루션이 가장 잘 알고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운 것이다.

 

이 부분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외국 ERP 솔루션 가운데 인사관리 분야로 유명한 피플소프트가 끝내 국내 진출을 하지 않은 이유는, 인사관리야 말로 현지기업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 글로벌 표준을 앞세워 인사관리 프로세스를 고치기가 쉽지 않았다.

 

회계분야도 마찬가지. 국가별 관련 법 제도가 다른 상황에서 이 분야도 외국 ERP를 들여다 그래도 적용하기 쉽지 않았다.

 

"회사만의 고유한 회계처리 방식을 고집하는데, 사실 이것은 투명경영을 가로막는 불법 탈법 회계 프로세스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며 이런 점때문에 ERP는 초기 회계, 인사 등을 제외한, 생산관리 분야에 집중됐다.

 

이로써 제조업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외국 ERP 업체들과, 중견 및 중소기업 시장을 노린 '한국형' ERP가 영역을 나눠 시장 공략에 나선다.

 

◆ 정부의 ERP 구축 지원사업의 허와 실

 

2000년 들어서면서 ERP 시장은 정부가 직접 나서 중소기업 정보화를 지원하는 이른바 '3만 중소기업 IT정보화 사업'으로 일대 전기를 맞는다.

 

2001년부터 시작된 이 사업은 정부가 국내 중소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ERP를 싼값에 구축, 지원하는 대대적인 사업. 국산 ERP 업체들에게 거대한 시장 확산의 기회가 열린 셈이다.

 

이 사업에 참여를 위해 새로 ERP 시장에 참여한 업체들까지 포함, ERP 시장에는 100여개가 넘는 국내 업체들이 정부의 지원사업 확보를 위해 각축을 벌였다.

 

중소기업의 정보화를 돕고, 국산 ERP 업체들에게 시장을 만들어 줌으로써 국산 ERP의 경쟁력 강화까지 도모하겠다는 정부의 지원사업은 그러나, 결과적으로 소기의 성과보다는 부작용으로 인한 후유증이 더 우려되는 결과를 낳는다.

 

ERP를 도입하는 것은 기업의 업무 프로세스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선행돼야 하는 작업. 따라서 구축 이전에 꼼꼼한 컨설팅이 필수적이며, 또 기업 전반의 정보화 시스템인 만큼 사후 지원 서비스도 중요한 부분이다. 이는 적지않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일이다.

 

그러나 정부의 정책은 단순히 ERP 패키지 설치에만 중점을 두고, 구축 자금 지원에만 집중하면서 '1만개 기업', '3만개 기업' 하는 식으로 숫적 확산에만 신경을 쓴 측면이 강했다. 이러다 보니, 기업당 지원되는 자금도 제대로 된 ERP 시스템 구축을 위해서는 턱없이 부족했다.

 

ERP업체들도 수지타산이나 지원능력 등에 대한 면밀한 검토보다는 '일단 따고보자'는 식으로 무리하게 뛰어들어 충분한 지원을 제공하지 못하는 기업들이 많았다. 정부의 지원사업이니만큼 지속적인 지원을 기대했고, 또 일단 고객을 확보해 외형을 성장시키자는 생각에 무리하게 사업수주에 뛰어든 것이다.

 

결국 '박리다매'식으로 가능한 많은 물량을 확보해야 만 수익이 나오는 만큼, 무리한 수주에 나섰던 ERP 업체들 가운데 부실지원으로 인한 중소기업의 외면으로 결국 도산하는 경우까지 발생하고 만다. 이는 다시 국내 ERP 업체들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고 말았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정부의 지원사업에 소극적이었던 기업들만 오히려 살아남았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

 

ERP 업체 대표는 "한때 정부의 지원사업을 몇 개 땄다는 게 자랑거리인 적이 있지만, 지금은 오히려 정부 지원사업을 많이 하고 있다는 걸 숨기는 분위기"라고 조심스럽게 전했다.

 

2000년들어 3~4년간 ERP 시장을 뜨겁게 달궜던 정부의 중소기업 정보화 사업은 애초 계획이나 기대와 달리 이렇듯 시장에 적지않은 악영향도 함께 남기고 말았다. 2003년까지 열기가 식지않았던 '한국형' ERP도 이후 대표적인 업체 한 두곳을 제외하고 대부분 명맥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으로 몰리고 만다.

 

2005년 현재 새로운 기회와 위기

 

SAP나 오라클, 새로운 후발주자인 마이크로소프트까지 외국의 대형 ERP 기업들이 현재 가장 주목하고 있는 시장은 중견중소기업, 이른바 SMB 시장이다.

 

이곳은 그동안 국산 ERP 업체들이 그나마 텃밭으로 지켜온 곳. 국산 ERP 업체들이 10년 가까운 시간동안 확고한 시장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들 외국 기업들의 대대적인 하향 공세는 국산 ERP 업체들에게는 큰 위기로 다가온다.

 

SAP의 한 고위 임원은 "중소기업에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국산 ERP가 많이 공급돼 있어 놀랐다"면서도 "그러나 10년 동안 국산 ERP가 기술적으로 외국 솔루션을 상대할 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제 외국 ERP 솔루션은 가격 경쟁력에서도 국산 ERP를 능가하는 상황이어서 경쟁의 결과는 뻔한 것 아니겠는가"라고 자신했다.

 

외국 ERP 업체들은 중소기업을 겨냥한 별도의 소규모 패키지를 별도로 내놓고, 또 그동안 직접 라이선스 영업을 해왔던 것과 달리 국내 파트너들을 선정해 이들을 통해 공급하는 간접영역 방식을 채택해 시장을 파고들 태세다. 이는 국산 ERP 업체들에게는 위협적일 수 밖에 없다.

 

외국 업체들은 국산 ERP 업체들에게 "무모하게 경쟁하려 하지 말고, 우리의 파트너로 들어와 우리 제품을 시장에 파는 게 현명한 선택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을 정도. 실제 국산 ERP 업체들에게 이같은 제안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산 ERP 업체들은 이같은 그냥 흘려넘기기 힘든 상황이다. 아직까지 외국 기업들의 중소기업 시장 공세가 가시적인 위협 수준까지는 아니라해도, 분명 갈수록 시장의 위협은 더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2006년이후 본격적인 중소기업 ERP 시장에 나서고, SAP와 오라클이 이를 막고 자신들의 입지를 선점하기 위해 대공세를 펼치게 되면, 국산 ERP 업체들의 시장구도에도 일대 변화가 일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국내 ERP 시장에서 선두권에 속하는 국산 ERP 업체는 더존디지털, 삼성SDS, 소프트파워, 영림원, 창해소프트, 비디에스인포컴, 한국하이네트 등이다. 이들은 한국IDC ERP 시장조사에서 시장 점유율 ' 10'에 오른 국산 ERP 업체들이다.

 

SAP코리아가 36.2%로 멀찌감치 앞서 1위를 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한자리 숫자의 미미한 점유율이긴 하지만, 더존디지털이 지난해 한국오라클의 부진을 틈타, 회계 솔루션의 강점을 앞세워 2위로 올라 선 것이 눈에 띈다. 건설업 시장에 특화한 건설 ERP로 새롭게 떠오는 창해소프트도 국산 ERP 업계의 주목되는 후발주자.

 

이밖에 순위에는 없지만, 인사관리 솔루션 분야에서 SAP나 오라클과도 당당히 경쟁을 펼치고 있는 화이트정보통신 등 특화 시장을 노린 기업들의 선전은 주목되는 점이다. 특화된 영역의 전문성 강화가 향후 국산 ERP의 미래에 대한 하나의 모범답안으로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특화 경쟁력도 아직은 골리앗들이 감히 넘보기 어려울 정도의 수준은 아니다. 그동안 거인들의 시선이 비켜가 있었던 시장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한국형'으로 시작한 국산 ERP 솔루션들의 '구력'도 이제 10년 가까이 이르렀다. 그동안 수많은 위기를 헤치고 중소기업 시장을 지켜왔다. 그러나 '한국형'끼리의 경쟁이었다. 이제 체급이 다른 경쟁자들과 무제한 경쟁이 시작됐다.